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몽테뉴Montaigne의 주장처럼 "철학을 한다는 것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시대에 진입했다. 왜냐하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인류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문명으로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 기후변화인민행진은 목적이 없었고 산만하고 피상적이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기후변화인민행진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유엔의 정치가들은 무지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썩었다. 하지만 유엔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적절한 법을 통과시킨다거나 정확한 탄소 가격을 찾아낸다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인식을 제고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 슬로터다이크는 인간 떼에서의 철학자의 역할을 정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리듬에 따라 수벌과 반대되는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적 비트에 맞춘 춤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독단적으로, 의무론적으로 움직이는 춤도 아니고 자신과 집단 생활 간의 연결을 영구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우리 가 살아가고 있는 장인 사회적 에너지의 파동으로부터 계속해서 스스로를 면역시키는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스트레스-의미론적 연쇄 속의 전달자'가 되도록 허용하는 한, 우리는 내용과 무관하게 재전송의 채널을 강화하고 대중사회의 자동 반사적 결합 조직을 강력하게 만들고 우리 모두를 민족주의, 희생양 만들기, 공황, 전쟁열 같은 바이럴 현상에 빠져들기 쉽게 만든다. 저 사회적 생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모든 훌륭한 철학이 그렇듯이 무정부주의적이고 반생산적이다. 만일 방해가 성공하면, 우리는 멈춰 서서 우리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만일 방해가 실패하면 -많은 경우에 실패하며, 심지어 늘 실패하지만- 방해자는 편입되거나 미친 듯이 분노하게 되거나 무시당하게 되거나 파괴된다. (...) 슬로터다이크는 사회적 자극에 대한 자율적 대응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아니고 자극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자극을 방해해 사그라들게 만들거나 아니면 자극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준다.